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문단 편집) === 황제로서 === 당대부터 현재까지 역대 로마 황제 중에서 가장 고결한 황제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실천하는 스토아 철학자이기도 했다. 따라서 당대 사람들도 인정했듯이 그는 위기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을 하얗게 불태우면서 나라를 위해 헌신했던 명군으로 추앙받았다. 유례없는 태평성대를 보낸 선제와 달리 그는 재위기간 동안 군사령관이자 황제로서 힘든 삶을 보내야 했다. 어린 시절부터 철학을 논하고 사색에 잠기는 것을 좋아하던 사람이 재위기간 내내 이민족과의 전쟁에 시달렸고, 황제가 된 이후 계속해서 전쟁터에 나가야 했다. 당시 [[로마 제국]]에는 유행병이 퍼져서 제국은 혼돈으로 빠지고 있었다. 따라서 로마군 최고사령관이었던 마르쿠스는 가장 치열한 전장이었던 [[도나우 강]] 방어선에서 고된 국방 문제까지 앞장서서 해결했다. 이런 격무들은 본래부터 건강치 않았던 그를 악화시켰으며, 끝내 로마 황제 최초로 전장에서 황제로서의 임무를 수행하다 도나우 전선의 빈도보나 병영에서 삶을 마감하게 만들었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헌신과 노력은 위기에 빠진 제국의 상황을 최악으로 떨어지지 않게끔 했다. 그렇지만 이런 공로보다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동시대, 후대 로마인과 오늘날 현대 서구권 사람들에게 황제로서 최고의 지도자, 명군으로 찬사받은 이유는 또 있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치세기부터 벌어진 문제를 인식해 후대 황제들에게 청사진을 그려준 황제였기 때문이다. 내치와 국방이 갈수록 복잡하고 점증된 군국화 속에서도 대내외적인 군사적 양상 속에서 문제가 심화될 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방법을 쓰면서 문제 해결책을 모두 내놓았다는 극찬을 받고 있다. 자신이 즉위하기 전까지, 본인조차 제국의 모든 문제를 고시, 법령, 칙답을 늘리는 상황이 일상화되고 원로원은 황제가 책임은 지고 자신들은 재가만 하고 비난만 하면 된다는 모양새로 나오는 현실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현명하고 단호한 황제였다. 그는 항상 법안을 원로원에 제출하여 재가를 받은 뒤 시행하면서도 단 한 번의 수정 없이 원로원과 군부 모두를 따르게 할 정도로 뛰어난 내치 능력과 정치력을 발휘했다. 이는 황제와 관료들의 중앙 권력이 강화되고 원로원이 무능함에도 과거보다 더 폐쇄적으로 귀족화되는 현실에서, 기존의 프린키파투스(원수정)가 가진 한계를 후임 황제들이 어떻게 개편하면 좋은가에 관한 해답과 청사진을 마련해줬다. 군대 장악에 있어서도, 그는 본인과 후계자, 본인의 가문 이름과 존재만으로 군대를 효과적으로 장악하는 능력을 발휘했다.[* 이런 이유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그 후계자들인 [[세베루스 왕조]] 황제들은 스스로의 정통성을 올리고 원로원과 군대 모두의 지지를 얻기 위해 제호에 안토니누스를 넣고 스스로를 안토니누스 가문이라고 자처했다. 물론, 이는 4세기 이후 로마 황제들의 제호로 널리 쓰인 플라비우스처럼 로마인들의 눈엔 정치적 상징성이 명확한 까닭에, 여전히 세베루스 가문 혹은 셉티미우스 가문으로 불리는 일이 많았고 심할 경우 이들은 시리아인이라고 불렸다. 왜냐하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혹은 콤모두스와 어떤 인척 관계도 없고, 로마 귀족 사회 안에서 세베루스와 그 후계자들이 40년여 간 존속하면서 보여준 모습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연상될 만큼의 모습은 전혀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사색을 좋아하고 학문을 사랑하는 학자 타입이었고, 부모와 가문 모두 로마 귀족의 전형인 황제였다. 그럼에도 그는 인재 기용에 있어서, 과거의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1세]], [[베스파시아누스]]처럼 부하를 대할 때 능력을 중시하면서도 성실함과 노력을 더 높이 평한 황제였다. 심지어 후방에서 명령을 내리는 일을 당연시하지 않고, 전선에 나갈 때마다 추위에 덜덜 떨며 쿨럭거리면서도 최전선에 항상 나가서 전쟁을 진두지휘하고, 속주 곳곳을 손수 보면서 전후 복구 사업에서도 모든 것을 꼼꼼하게 챙기고 확인까지 한 완벽주의자였다. 그럼에도 그는 틈틈이 로마로 돌아와서 국정을 돌보고, 전장에서도 사무처리를 하는 등 성실하면서도 근면한 태도를 유지한 황제였다. 마르쿠스는 로마 제국 안에서 혈통보다 능력이 더 존중받는 로마군 안에서 샌님, 타고난 귀족 그 자체로 보였음에도 큰 존경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몸소 헌신해 메꿨고, 주변 장군과 하위 지휘관들의 충언도 흘러듣지 않고 받아주는 유연함을 한결같이 보였다. 군에서 헌신한 이들을 기억했다가, 이들을 신참자로 추천해 원로원 의석을 줄 정도로 또래 원로원 귀족 출신들과는 그 결이 달랐던 황제였다. 마르쿠스는 젊은 시절부터 군무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에 전술 지휘 능력은 없고, 즉위 전까지는 로마와 이탈리아 밖으로 나간 적이 없었음에도, 의외로 전략적 식견으로는 군사 분야에서조차 '''유능했다.''' 따라서 젊은 시절부터 격무에 시달려 건강이 악화된 황제가 힘든 전선 활동과 숙영지 생활을 군소리없이 견뎌낸 사람임을 모를 리 없는 그의 장군들과 직업군인들, 군단병들은 전력을 다해 그와 그의 가문에 진심으로 헌신했다. 그래서 그가 죽기 직전의 로마군은 도나우 강을 건너서 보헤미아 지역을 평정하고 있을 정도였고, 뒤를 이은 아들 콤모두스가 부적격자로 판정받았음에도 제국을 뒤흔든 내전이 벌어지지 않게끔 해줬다. 또한 전쟁 중 그가 취한 서방 속주 일대의 재건 사업과 게르만족 포로들과 그들 가족들에 대한 시혜책들은 이후 로마 제국이 위기 상황에서 버틸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주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